“휘고 찢어진 세월의 흔적을 펴드립니다…저는 책 수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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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에 새 생명을”…‘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

‘책 수선가’는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 망가진 옷이나 구두를 수선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망가진 책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일은 책 보존(Book Conservation),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전문가는 책 보존가(Book Conservator)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는 책 보존이라는 어렵고 생소한 분야를 옷수선이나 구두수선처럼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일상적인 분야로 바꾸고 싶었다. 그가 책 보존 대신 책수선이란 이름을 내건 작업실을 열고 책 수선가로 살고 있는 이유다. 최근에는 지금까지 작업해온 책과 그 기록을 모은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2022년 1월 4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주택가 골목 사이에 있는 재영 책수선을 찾았다. 의뢰받은 책 수선으로 한창인 배 대표는 미리 잡은 인터뷰 시간을 내기에도 몹시 분주해 보였다.

배재영 대표가 수선 의뢰를 받은 책을 살펴보고 있다. /jobsN

-책수선을 맡기는 분들이 많나 봐요?

“2018년 2월 처음 작업실을 열 때만 해도 책수선을 생소해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책을 수선하기보다 새로 사는 게 훨씬 간편하고 쉬운 시대니 그럴 만도 하잖아요. 하지만 낡고 망가져도 절대 버리지 못하는 소중한 책들을 수선해서 간직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서서히 책수선을 의뢰하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작업 순서를 기다리는 책도 많아졌고요. 의뢰한  책수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 보니 작업으로 늘 분주한 편이에요.”

-어떤 책들이 주로 들어오나요?

“어릴 때 좋아했던 동화책, 여행가서 구입한 헌책, 컬렉션으로 모은 책, 부모님 유품으로 남은 일기장, 대대로 물려받은 사전이나 성경책, 부모님께서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들, 친구와의 여행 일지를 적은 노트, 구매하고 보니 망가져 있던 중고책, 요리책, 악보, 좋아하는 소설책, 100년도 넘은 고서적들, 이제는 구하기 힘든 만화책…정말 셀 수 없이 다양한 책들이 들어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소중한 시간과 추억이 담긴 책들이 많아요. 책 외에도 아이돌 굿즈나 액자도 들어옵니다.

책 수선이라고 하지만 종이와 관련된 모든 걸 수선하고 있는 것 같아요. 표지나 내지가 살짝 찢어진 경우도 있지만 책등이 분리되거나 휘어지고 곰팡이나 얼룩으로 가득한 경우까지 들어오는 상태도 천차만별입니다. 아예 표지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책의 상태에 따라 작업 방향을 정하고 의뢰인의 의견을 수렴해 책을 수선하는 게 제가 하는 일이지요.” 

‘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가 작업대에서 의뢰받은 책을 살펴보고 있다. /jobsN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책수선은 저도 생소한 분야였어요. 2014년 미국 대학원에서 ‘북아트(Bookart)’와 ‘제지(Papermaking)’를 전공하면서 처음 접하게 됐어요. 원래 제 전공은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이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전공을 위해 빨리 숙련해야 할 기본적인 장비와 재료들, 그리고 손기술이 너무 많았어요. 난감해하는 저에게 지도교수님이 책 수선가로 일을 하며 배우라고 조언하시더군요. 다양한 책의 구조를 살피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단계별로 접하면서 다양한 기술을 빠른 시간 안에 연마할 수 있다고 했죠.

운이 좋게도 제가 다닌 학교는 커다란 건물 지하 한층을 모두 ‘책 보존 연구실’로 쓰고 있을 정도로 도서관 시설과 재정이 좋았어요. 책 보존 연구실은 졸업생 논문과 일반 서적, 그리고 희귀 서적들까지 도서관에서 보유한 모든 책을 다루는 곳이었어요. 요즘 대세인 디지털 아카이빙부터 파손된 책이나 희귀서적을 직접 수선하는 일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뤘습니다. 저는 연구실에 재빨리 취직했고 처음 계획과는 달리 3년 6개월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처음에는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구실에서 접하는 다양한 파손 형태들이 무척 흥미롭더라고요. 그걸 제한 없이 언제든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우리가 살면서 새 책은 쉽게 보지만 파손된 책을 볼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연구실에서 일하는 기간이 길어졌어요.  하루에 최소 4시간에서 많게는 6시간 동안 책을 고쳤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평균 10권 내외에 책을 담당했고 희귀 서적이거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에는 몇 달이 걸리기도 했어요. 대충 계산해 보니 3년 6개월 동안 아무리 못해도 1800권 이상의 책을 수선했더라고요. 그러면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다양한 기술들을 연마했어요.

생소한 분야지만 매력 있는 일이고 기술도 쌓이다보니 책 수선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졌어요. 한국에서 책수선이라는 분야를 알리고 싶었고요. 그렇게 2018년 2월 ‘재영 책수선’을 열고 책 수선가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재영 책수선’을 연 지도 4년이 다 됐는데 그동안의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가장 처음 의뢰받은 ‘국어대사전’(‘89 시행 개정 한글 맞춤법 수록 국어대사전)이에요. 요즘은 보기 힘든 판형의 아주 커다란 사전으로 상, 하 2권이 모두 커버가 분리되고 책등이 손상되고 커버가 휘어져 있었어요. 의뢰인은 어릴 때부터 부족한 놀거리 대신 이 책을 자주 펼쳐봤다고 했어요.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삽화들을 보거나 단어들의 뜻을 찾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어요. 의뢰인은 앞으로도 이 책을 자주 펼쳐볼 수 있도록 튼튼하게 고쳐달라고 했어요.

‘재영 책수선’을 열고 첫 의뢰를 받은 국어대사전. 책 표지가 분리되고 커버가 휘는 등 파손 정도가 심했다. /재영 책수선

둥글게 휜 커버는 장시간 압력을 가해 다시 평편하게 펴주었고 보강제가 떨어져 나가거나 제본이 헐거워진 탓에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던 책등은 망치로 두들겨가며 형태를 잡아줬습니다. 낡거나 분실된 헤드밴드도 색색의 새것으로 교체했고요. 많이 닳아 흐릿해진 표지의 겉싸개와 제목 부분은 처음 출간했을 때와 꼭 닮은 색으로 다시 채워넣고 광을 냈습니다. 이밖에도 찢어진 페이지를 다시 붙이고 분해된 표지와 본문을 압체했고 드문드문 뭍어 있는 오물은 약품으로 세척했어요.

수선 작업을 마친 국어대사전. /재영 책수선

수선을 마친 국어대사전을 받아본 의뢰인의 말이 지금도 기억 나요. “어렸을 적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일할 때는 받아보지 못한 감정을 그때 처음 느꼈어요. 수선된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상을 줄 수 있는지를요. 책 수선이 끊어진 책과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잇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덕분에 재영 책 수선의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었어요. 지금도 책 수선 일을 하며 종종 지칠 때마다 첫 의뢰인이 한 말을 생각하며 힘을 내곤 해요.”

-수선하기 가장 힘들었던 책은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사를 한 권에 담은 ‘The Manchester United Opus’(2006)였어요. 가로 60㎝, 세로 60㎝에 두께 14㎝, 무게 37㎏으로 제가 지금까지 작업한 책 중에 가장 크고 무거운 책입니다. 맨유의 128년 역사를 모두 담은 책이다 보니, 페이지도 800페이지에 달했어요. 커버는 물론 내지까지 파손이 심했는데, 양도 많고 혼자서 옮기기도 어려웠어요. 작업 시간도 4개월 정도 걸렸어요. 큰 책이라 조심스럽기까지 해서 굉장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 대표의 손을 거쳐 깨끗하게 수선된 맨체스터 화보집 내지. /재영 책수선

배 대표의 작업실에는 책 수선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와 도구가 있었다. 망가진 책을 수선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 과정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의뢰받은 책이 다시 의뢰인에게 돌아가기까지의 노력과 수고가 사뭇 느껴졌다.

-작업실 관리도 중요할 것 같아요.

“종이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습도 유지가 정말 중요해요. 작업실을 구할 때 일부러 북향을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정리정돈도 신경 써요. 도서관에서 일할 때 제 상사가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리정돈을 했는데, 일을 해보니 그게 오히려 효율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정리정돈에 신경을 써요. 작업을 마치고 모든 작업대를 정리하고 도구를 정리하는 게 원칙이죠. 업무 효율을 위해서도 도구나 장비를 정리정돈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음료는 꼭 뚜껑이 있는 걸로 마시고요. 종이는 기름기에 취약하기 때문에 일하는 동안은 손을 자주 씻어요. 손이 항상 건조하지만 핸드크림은 일이 끝난 후에만 바릅니다.”  

배 대표 작업실에 있는 장비들. /jobsN

-최근에는 그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펴냈던데, 책수선 작업을 계속 기록해온 건가요?  

“작업실을 열고 첫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기록을 남겨왔어요. 의뢰인이나 보통 사람들이 책 수선 후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다면, 저는 수선 전의 모습, 파손된 상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수선을 하고 나면 그 모습은 사라지게 되잖아요.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뢰인에게도 책을 돌려줄 때 수선 전 모습을 찍은 사진을 인화해 드리고 있어요. 망가진 모습도 그 책이 가진 시간의 일부이자 의뢰인과의 추억이라고 생각해요.”  

-책 수선가로서 느끼는 보람은요?

“의뢰인이 만족스러워 할 때요.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면에선 한국에서 워낙 알려진 분야가 아니다 보니 저를 통해 책수선이란 분야를 책수선가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고 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책 수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제가 책수선이란 분야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니,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수선 전과 후의 모습. /재영 책수선

-책 수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따로 자격증이나 정규 과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책 수선가 중에는 저처럼 북아트, 제지를 전공한 사람도 있고, 미대나 문헌정보학과, 화학과 출신들이 많습니다. 각 전공을 기반으로 전문가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해요. 제 경험상 한국보다는 미국이 관련 인프라나 연구실, 일할 기회가 많고 접근성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책 수선가로서의 바람과 목표가 있다면.

“책수선이 옷수선이나 구두수선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일이 됐으면 좋겠고, 책 수선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환경이 갖춰지면 좋겠어요. 저 같은 책 수선가가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죠. 가능하다면 제가 그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글 CCBB 키코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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