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축구장 찾아 응원하던 남자, 누군가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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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극비리에 제주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수원FC와의 ‘하나원큐 K리그2 2020 25라운드’ 홈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서다. 제주 유나이티드는 SK그룹이 운영하는 유일한 축구단이다. 이날 최태원 회장은 선수단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소란스럽지 않게 경기장을 찾았다. 그는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득점할 때마다 기립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이에 제주는 승리로 보답했다. 평소 최 회장의 제주유나이티드FC 사랑은 유명하다. 지난 시즌 2부 리그로 강등당한 제주는 최 회장의 아낌없는 투자와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팀을 위해 들인 돈도 엄청나다. 지난 시즌 제주 유나이티드는 2부 리그 중 가장 많은 인건비를 쓴 팀이었는데, 선수들에게 지급한 연봉만 총 약 74억원이었다. 제주의 인건비 지출 규모는 K리그1에서도 7위에 해당한다. 승격을 위해 그만큼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는 이러한 지원을 발판 삼아 올 시즌 K2 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면서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제주-수원 전을 관람하고 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좌), 팀 창단 이후 첫 정규 시즌 우승을 이룬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우) /한국프로축구연맹, NC 다이노스

지난 시즌에 대기업 총수인 구단주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또 있다. 창단 9년 만에 2020 KBO리그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KS) 통합 우승이라는 꿈을 이룬 NC다이노스다. 구단주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어린 시절 야구선수 고 최동원을 동경해 야구에 빠졌다. 이후 그룹의 오너 자리에 오른 뒤 야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과감한 투자와 구단에 대한 애정으로 NC의 통합 우승에 기반을 마련했다. 경기장을 자주 찾아 선수들을 응원했고, 선수단·팬들과 소통하면서 ‘택진이 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NC다이노스는 2018년 리그 최하위로 추락한 후 전폭적인 투자로 전력을 보강해 강팀으로 거듭났다. 실제로 4년 총액 125억원에 4번 타자인 양의지를 영입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한국시리즈(KS) 우승 뒤 NC 선수들이 펼친 ‘집행검’ 세리머니는 큰 화제였다. 집행검은 모기업 엔씨소프트가 만든 게임 리니지의 대표 무기다. 팀 주장이자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양의지가 검을 뽑아 들자 선수들은 환호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6경기 내내 야구장을 찾아 응원한 김택진 대표는 우승 확정 후 그라운드로 내려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눴다.

우승 확정 후 그라운드로 내려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눈 김택진 대표. /유튜브 채널 NC 다이노스
리니지의 대표 아이템 ‘진명황의 집행검’을 들고 있는 양의지. 집행검 세리머니 아이디어는 선수단이 직접 냈다. /유튜브 채널 NC 다이노스, YTN 영상 캡처

이처럼 남다른 스포츠 사랑을 보이는 대기업 총수들이 많다. 각자 매력을 느낀 스포츠나 지원하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직접 경기장을 찾아 선수를 격려하기도 하고, 그룹 차원에서 실업팀을 꾸리거나 경기 시설이나 훈련비 등을 지원해주는 곳도 있다. 기업 브랜드를 높이는 동시에 사회 공헌 효과도 있어서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에 전폭적인 재정적 지원과 투자를 해 국내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대기업 총수들에 대해 알아봤다.

고 삼성 이건희 회장의 레슬링 사랑은 유명하다. 일본 유학 때 프로 레슬러 역도산의 경기를 자주 본 이 회장은 레슬링에 빠졌다. 고교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수로 활동할 만큼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웰터급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지만 연습 도중 눈썹 부근이 찢어졌고, 가족의 반대로 더는 운동을 하지 못했다.

(왼쪽부터)1950년대 일본 유학 시절 삼성 이건희 회장 모습,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6월 21일 오후 성남상무체육관을 시찰한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조선일보DB
달링하버 레슬링 경기장에서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시드니=사진공동취재단

레슬링 선수로서의 꿈을 다하지 못한 이 회장은 그룹 오너의 자리에서 한국 레슬링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나섰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비인기 종목인 레슬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또 빙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삼성그룹에서 빙상 종목에 대규모 투자를 하도록 했고, 그 결과 피겨스케이팅이 세계 최정상에 오르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이건희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한국 스포츠 외교를 이끌기도 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170일에 걸쳐 11번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동료 IOC 위원들을 만나 평창 지지를 호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밖에도 이건희 회장은 프로야구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구단주를 지내면서 야구 발전에도 힘썼다. 또 삼성 스포츠단은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 인기 종목뿐 아니라 레슬링, 럭비, 배드민턴, 승마 등 비인기 종목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2008년 베이징대회 직후 ‘양궁인의 밤’ 행사에서 여자단체전 금메달리스트 박성현 선수와 악수하는 정몽구 회장(좌). 리우 대회 여자단체전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딴 장혜진 선수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정의선 부회장(우).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명예회장은 양궁에 큰 애정을 쏟아 왔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이던 시절 1984년 LA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고 양궁 지원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양궁협회장에 취임한 정 회장은 현대정공에 여자 양궁단, 현대제철에 남자 양궁단을 창단했다. 정 회장은 1985년부터 1997년까지 4번의 양궁협회장을 역임했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명예회장직을 맡아 32년간 양궁 발전에 힘썼다. 인재 발굴, 첨단 장비 개발 등에 450억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현대정공에서 레이저를 활용한 연습용 활을 제작해 양궁 선수단에 제공하게 했다. 맛있는 음식을 선수들에게 보내고, 경기 전 현지에서 선수들을 초청해 만찬을 열기도 했다.

양궁대표팀 선수들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삼보드로무 양궁장에서 정의선 대한양궁협회장을 헹가레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현재는 장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아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36년째 대를 이어 전폭적 지원을 하는 셈이다. 정의선 회장은 2014아시안게임 때 양궁 경기가 열린 기간 동안 직접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챙겼다. 그는 평소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을 찾아가 식사하면서 책이나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우올림픽 때에는 현지를 방문해 주요 경기를 직접 관람하면서 응원했다. 또 선수들을 위해 휴게실, 물리치료실, 샤워실 등이 갖춰진 트레일러 휴게실을 준비했고, 경기장에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사설 경호원을 고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동 시에는 특수 제작한 방탄차까지 제공했다.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한국 양궁은 금메달 4개(남녀 개인전·남녀단체전)를 휩쓸었다. 협회 차원에서 장학금 지원 등 유소년 선수 육성에도 나서고 있다. 양궁 외에도 정의선 회장은 전북 현대모터스 구단주로서 축구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쏟고 있다. 그 결과 2017년부터 2020년까지 K리그 4연패를 달성하면서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탁구 경기장을 찾은 모습. /대한항공 제공

2008년 7월부터 대한탁구협회장을 맡았던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생전 남다른 탁구 사랑으로 유명했다. 한진그룹은 고 조중훈 선대회장 시절인 1973년 대한항공 여자실업팀을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탁구와의 인연을 맺었다. 조양호 회장은 큰 경기가 있을 때마다 직접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했다. 또 경기 장면을 직접 찍은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어 선수와 코치진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구 경기 관람을 즐겨 직접 주요 경기 장면을 따로 보관해둘 정도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조양호 회장이 탁구 예선부터 결승까지 17일간 모든 경기를 참관하면서 선수들 곁을 지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또 현역 탁구인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은퇴한 선수를 위해 어학연수나 대학원 진학 등도 직접 도왔다.

현정화 탁구 감독과의 일화도 있다. 2011년 현정화 감독은 국제탁구연맹 총회에서 미디어위원회 위원이 된 이후 탁구 국제 행정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 심판진, 운영진 등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조양호 회장은 본인이 재단 이사로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남가주대학(USC) 총장에게 직접 추천서를 써서 보냈다. 이에 현정화 감독은 USC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벌 그룹들이 1년에 스포츠에 투자하는 금액은 수천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있는 해는 투자 금액이 더 불어난다. 이 밖에도 여러 국내 기업들이 스포츠에 직·간접 투자를 하고 있다. SK텔레콤은 펜싱, KT는 하키 등을 후원해오고 있다. 포스코건설은 자체 체조 실업팀을 운영하는 등 대한체조협회의 후원 기업으로 있다.

글 CCBB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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