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더…” 화장실 갈 때마다 애원해야 하는 회사

38

직장갑질119, 10대 갑질 대상 선정
5인 미만 사업장, 원청회사 갑질 많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보완해야”

‘과거 영주처럼 임원들이 부하 직원이나 하도급업자를 다루는 행위.’ 2018년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을 보도하면서 갑질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조 전무는 광고대행사 직원들과의 회의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유리컵을 던지고 종이컵에 든 매실 음료를 이들에게 뿌린 혐의를 받았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물벼락 갑질은 하청업체에 대한 원청회사의 대표적인 갑질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MBC 방송화면 캡처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2019년 7월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접적 처벌 조항이 없고,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등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올해 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신원이 확인된 이메일 제보 가운데 기존에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2849개 사례 중에서 10개 사례를 뽑아 ‘갑질 대상’으로 선정했다.

◇시간 외 업무 지시부터 무임금 노동 강요···골고루 갑질한 중소기업 사장

올해의 ‘갑질 대마왕’(갑질 대상)은 여러 계열사를 가진 중소기업 사장 A씨가 뽑혔다. 직원들의 제보로 드러난 갑질 행위만 10개에 달했다. A씨는 코로나19를 이유로 인해 회사가 수입이 없다며 직원들에게 6개월간 무급휴직 또는 무임금 노동을 강요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열정이 없는 자는 이 상황을 함께 헤쳐나갈 수 없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함께 보내며 응하지 않으면 해고한다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A씨는 직원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위법행위도 저질렀다. 그는 직원들에게 3개월 내 성과를 내면 월급 인상과 추가 근무수당·인센티브 지급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직원들은 매일 야근하고, 주말까지 추가근무를 해서 성과를 냈지만, 약속받았던 수당을 받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단체 대화방에는 10명 이상 들어와 있지만, 서류상 회사를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조했고, 직원의 4대 보험 가입이나 연차 휴가 사용 등을 막았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 결과. 지난해 갑질이 가장 심한 항목이 시간 외 수당 지급이었다. /직장갑질119

메신저를 이용해 업무 시간 외 업무 지시도 수차례였다. 직원 동의 없이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해 직원을 감시했고, 직원을 수시로 해고하거나 협박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후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불법체류자라고 협박하는 등 노동을 착취했고, 여직원들에게는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직원들은 A씨가 퇴근 후 개인적인 만남을 요구하거나 여직원을 호텔로 부른 적도 있다고 제보했다.

◇모욕과 폭언 일삼은 사례 가장 많아

10개 사례 중에는 직원들에게 막말·폭언하거나 모욕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쌍욕대상(폭언)에 선정된 한 회사의 사장 B씨는 직원에게 폭언하면서 모욕을 줬다. 제보자가 공개한 녹취록에는 “야 너 장난하는 거 같아 지금? 여기 놀러 나와? 이 XX. 여기 놀러 나와 여기?”, “XX 내 말이 X같냐?” 등 입에 담기도 힘든 폭언을 퍼붓는 음성이 담겨 있었다. 제보자는 B씨가 온갖 폭언을 퍼부었고 들고 있던 컵도 던졌다고 덧붙였다. 참다못한 한 직원이 노동청에 신고하러 갔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이어서 그냥 돌아와야 했다고도 전했다.

직장 내 상황을 가정한 ‘무한상사’에서 후배에게 폭언하고 있는 정형돈. /MBC 방송화면 캡처

모욕대상은 대기업 화장품 회사의 점장 C씨에게 돌아갔다. C씨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실수한 돈을 물어내라면서 “알바 써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야 너 같은 걸 돈 주고 써 줬음 바닥에 엎어져 절이라도 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제보자는 C씨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함부로 대했고, 주휴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여러 지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돌려 사용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후배에게 모욕과 폭언을 한 직장 상사 D씨는 막말대상에 꼽혔다. D씨는 제보자에게 “네가 만든 건 쓰레기야”라며 막말했고, “쓰레기를 가지고 와서 봐달라고 하면 되겠어? 네가 만든 게 뭐라고?” 하면서 제보자 입에서 쓰레기라는 단어가 나오게 모욕했다. 외부에서 온 손님이 있을 때도 “야 너 이딴 식으로 할래? 사표 써, 너 자르라고 할 거야” 등의 말을 했다. 제보자는 “사무실에 더 있기에는 제가 죽을 것 같아서 퇴사했다”고 했다.

◇양진호·박찬주·조현민 떠올리게 한 이들

직장갑질119는 유형별로 나눈 수상 사례 중 일부에 해당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실명을 붙였다. 폭행 부문은 갑질 폭행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양 전 회장의 이름을, 잡무지시 부문에는 공관병 갑질로 논란이 된 박 전 육군 대장의 이름을 붙였다. 원청갑질 부문에는 물벼락 갑질을 일으킨 조 전무의 이름이 붙었다.

직장갑질119가 선정한 양진호상(폭행)은 후배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E씨였다. E씨는 차에서 후배 머리를 손으로 두 차례 가격했다. 후배가 실수하면 “XX 새끼야 왜 그랬냐? 한숨 쉬냐? 죽을래?”등의 폭언을 퍼부었고, “디지고 싶냐”, “패버린다” 등의 말을 계속했다. 정시에 퇴근했다는 이유로 전화로 “할 일이 없어 퇴근했냐? 그만두고 싶지? 그만두게 해줄게”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보자는 더 이상 무서워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며 E씨의 갑질을 제보했다. 

후배들을 괴롭히는 역할로 나왔던 배우 손종학. /tvN

박찬주상(잡일 지시)은 매달 1박 2일 동안 별장에서 김장이나 밭매기 등 업무 외적 노동을 강제로 참여시킨 회사 사장 F씨에게 돌아갔다. F씨는 매달 야외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전 직원들을 별장으로 불러 울타리 공사나 led 교체, 세면대 수리 등 잡일을 지시했다. 제보자는 F씨가 이전에도 잡무 지시로 고용노동부에 신고당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신고 이후 일부 부서 사람들만 불러 잡무를 지시했고, 잠잠해지니 다시 회사 전 직원들에게 업무 외적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고 했다. 

공공기관 주무관 G씨는 조현민상(원청 갑질)을 받았다. 공공기관 시설관리 업무 담당 용역업체에서 일한다고 밝힌 제보자는 해당 주무관이 의자·화분·피아노 나르기 등 업무와 무관한 잡무를 시킨다고 했다. 해당 주무관은 근무시간에 차를 고치러 가면서 심심하다고 용역업체 직원을 데려가고, 심지어 용역업체의 채용에도 직접 개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르라고 해서 직원이 그만둔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해당 업체는 계약기간이 끝나고 고용승계가 안 될 것이 두려워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화장실 사용 제한 등 황당하거나 엽기적인 갑질도

황당하거나 엽기적인 갑질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한 건설현장 반장 H씨는 한 직원에게 장난이라면서 자신의 성기를 엉덩이에 비볐다. 직원들에게 자신의 성관계나 유흥업소 이야기를 막 늘어놓고서는 나중에 유흥업소에 같이 가자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직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욕하거나 휴일에도 업무 지시를 했다. 제보자는 현장 소장에게 반장의 엽기적인 행위에 대해 털어놓았지만, “무시하라”는 말만 들었고 이후 반장의 갈굼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직장갑질119는 엽기적인 갑질 행위를 일삼은 H씨를 엽기대상(엽기 갑질)으로 선정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는 직장인 역을 연기한 배우 황보라. /JTBC 방송화면 캡처

팀원 중 한 명씩 화장실을 돌아가면서 가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 이용 시간에 제한을 둔 사업장도 있었다. 이 회사는 황당무상(황당 갑질)을 받았다. 회사가 정한 화장실 이용 시간은 10분이었다. 이 황당한 규정 탓에 직원들은 변비가 있으면 회사에 “변비가 있으니 5분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해야 했고, 이미 다른 팀원이 화장실에 갔는데 정말 급한 상황이라면 사유를 말하고 화장실에 가야 했다. 제보자는 화장실에서 배가 아파 12분 머무른 직원은 혼났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훔쳐보상(CCTV 감시) 수상자는 병원 곳곳에 CCTV를 설치해 직원을 감시한 원장과 임원 부부다. 이들은 환자 탈의실을 제외한 모든 곳에 CCTV를 달았다. 직원들이 불쾌해하자 “도난방지용”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상은 직원 감시용이었다. 점심시간에 쉬는 직원에게는 “쳐 자빠져 잔다”고 카톡을 보냈고, 환자가 없는 시간에 휴대폰을 하면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제보자는 직원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있다며 올해 1월 직장갑질119에 사연을 보냈다.

◇“직장, 생존 위해 출근하지만, 자아실현 하는 곳이기도”

직장갑질119는 이 같은 직장 갑질의 원인을 “구멍이 숭숭 뚫린 반쪽짜리 갑질금지법 때문”이라고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고,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 등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원청 업체 직원들이 막강한 갑의 지위를 이용해 하청·협력업체 직원을 괴롭혀도 신고할 곳조차 없다고 지적했다. 

직장갑질119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출근하는 직장이지만, 노동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을 하는 공간 역시 직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속한 법 개정으로 2021년에는 직장의 노동인권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또 “사장 친인척, 원하청 관계, 아파트입주민 등 사회 통념상 상당한 지위를 가진 ‘특수관계인’과 5인 미만 사업장으로 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 CCBB 라떼

img-jobsn

회신을 남겨주세요

귀하의 의견을 입력하십시오!
여기에 이름을 입력하십시오.